유럽 여행기
유럽 여행기 : 2014년 11월 16일 ~11월 24일(7박 9일)
: 8월의 명예퇴직과 10월의 성당 바자회가 끝난 후 갑작스레 찾아온 남모를 좌절감, 허탈함, 무력감, 상실감을 훌훌 털어버릴 겸 자녀들의 갸륵한 정성에 기대어 이 여행을 추진하게 됨에 속 좁은 마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으나 딸내미의 철저한 사전 준비로 어쨌든 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대한민국을 떠나게 되었다.
1일차 - 인천에서 로마까지
16일 13시 25분 인천국제 공항을 이륙하니 2004년 북경올림픽 직전에 가족여행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무려 10년만인가? 감개가 무량하다. 모두 효심어린 우리 자녀들 덕분이다. 오랜 기간 지리교사로 봉직한 때문인지 나는 항공기에서는 가급적 창가에 않아 기내에 큰 문제가 없는 한 지표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황해 바다는 거의 구름위로 지난 것 같았으나 중국의 화북지방을 지나면서 서서히 구름이 사라지니 지표 경관이 보였다. 대권항로라 극지방 가까이로 우회하는 것 같으나 실제는 최단거리 비행이다. 몽골 인근의 건조한 사막지대에서는 가느다란 몇 개의 물줄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그 물줄기를 따라 경지와 초원과 취락이 나타나고 있었다. 인간의 삶에서 물의 소중함이란 그 무엇에 비기리오. 다시금 듬성듬성 숲이 나타나더니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가 지나가고 가옥과 경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시베리아의 설원이 펼쳐진다. 유럽 대륙이 가까워지자 아래가 구름바다라 지표 관찰이 불가능하여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보다 8시간 늦은 시차의 밀라노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각 17시 50분경 이었다. 1시간 이상 공항내의 제한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큰 소리로 나누는 이탈리아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제야 한국을 떠난 것이 실감이 났다. 로마의 기상 사정으로 당초 예정보다 10분 정도 지연된 시각인 21시 경에 대한 항공이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착륙하면서 이탈리아에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비행시간으로 따지면 과거 학성 방통고 시절에 호주 여행을 한 것과 별반 차이가 없으나 호주는 시차가 1시간인데 반해 이곳은 시차가 8시간이라 내 생애에서 가장 긴 32시간의 하루를 보내게 되니 그 시차를 극복하고 적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평소 온돌방 체질이라 침대 위에서는 잠을 청할 수가 없어 맨 바닥에 누우니 냉기가 온몸을 감사고 돌아 선잠으로 이탈리아의 첫 밤을 보내니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4성급 호텔이라지만 우리나라 모텔급인 이 호텔의 구조와 시설을 접하며 유럽지역의 장기간 경제 침체를 피부로 느끼는 것 같았다. 반면 그들의 또 다른 측면, 검소하고 실질적이며 공공의 이익과 동시에 개인의 생활을 중시하는 풍조를 엿 볼 수 있었다.
2일차 - 폼페이, 소렌토, 카푸리섬, 나폴리
로마의 호텔에서 이탈리아 호텔식으로 조식후 A1 고속도로, 별칭 태양의 도로를 이용 로마에서 출발하여 격렬한 화산 폭발로 인해 고대 로마의 한 도시 전체가 고스란히 유적으로 남아 있는 폼페이까지 전세 버스를 이용하여 이동하게 되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인지 날씨가 맑았다가 흐렸다가 짙은 안개가 끼었다가 변덕스러웠다. 그럼에도 해안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밝고 깨끗한 파란 하늘, 천혜의 지중해성 기후로 인한 각종 특이한 경관이 여행객의 눈길을 멈추게 했다. 베수비오 화산은 기대보다는 작은 규모였으나 한라산 보다 훨씬 가파른 경사면으로 보아 화산 폭발시 용암과 화산재의 확산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만큼의 대폭발이었기에 항구도시가 내륙에 유적으로 남았을까? 사치와 향락의 호화롭던 도시가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어느 청춘 남녀의 사랑은 전설이 되어버린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다, 각종 고대 로마의 유적과 인간 화석과 찬란했던 고대 로마의 문화(수도, 도로, 목욕탕, 벽화. 신전, 의회, 광장)의 현장을 눈으로 직접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여행 일정상 주마간산으로 대충 본 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베수비오의 현지 식당에서 중식을 해결한 후 이 지역 특유의 이상한 그림으로 범벅이 된 나폴리-베수비오-소렌토 간에 운행되는 덜컹거리는 낡은 완행열차를 타게 되었다. 이 열차에서 타고 내리는 남이탈리아인들의 자유분방한 몸짓과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말씨는 매우 인상 깊었었는데 어느덧 소렌토에 내리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배운 노래 같은데 그 가사가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아 인터넷 검색 자료로 옮겨본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고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벗이여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소렌토시의 중심 가로를 가로질러 해변의 전망대로 향하니 아름다운 항구와 멋진 지중해 해변의 경관이 펼쳐졌다. 일행 모두가 갑자기 탄성을 올리면서 이를 배경으로 자신의 모습들을 사진기에 담기 바쁘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가사처럼 가파른 절벽 위의 이 도시는 모두가 맘속에 간직하고 싶은, 잊지 못할 고향과 같은 그리움의 여운을 남기는 곳이었다. 소렌토 항구에서 출발 카푸리 섬을 관광한 후 나폴리로 향하는 유람선에 승선하게 되었는데 거센 파도의 대책 없는 요동에 보나는 뱃멀미로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카푸리 섬은 지중해가 품은 보물로 기묘한 지형의 절벽, 강열한 태양열을 반사하는 흰색 가옥과 에머랄드의 청색 바다, 코발트 블루의 파란 하늘, 초록색 대자연이 조화를 이뤄 고대 로마제국부터 현재까지 별장지-휴양지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1인용 리프트로 고소 공포의 스릴을 느끼며 올라가니 사방으로 펼쳐지는 전망은 하늘 위의 신선이 노니는 천상의 정원, 무릉도원, 별천지였다, 어둠이 깔릴 쯤 바다건너 먼 불빛을 따라 나폴리로 향하니 나폴리의 수호신 이름이라는 산타루치아 항구가 우리를 맞는다. 중학교(?) 시절 불렀던 옛 노래 산타루치아가 떠오른다.
산타루치아
창공에 빛난 별 물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아름다운 동산 행복의 나폴리
산천과 초목들 기다리누나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정든 나라에 행복아 길어라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과거 프랑스령이었다는 누오보고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후 일정이 바쁜 관계로 다시 로마로 향한다.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에서 방치한 도시로, 과거의 낡은 영광만을 안은 채 현재는 무질서한 치안 부재의 남 이탈리아 중심도시이면서도 또 악명 높은 마피아의 본거지로서의 참담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그늘로 남은 이곳이 오늘날 이 나라의 격심한 남과 북의 지역차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캄캄한 밤, 장시간 고속도로 주행으로 로마로 귀환하여 휴식을 취했다.
3일차 - 로마와 바티칸시국
맑은 날씨임에도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에 우산을 챙긴다. 이탈리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철에는 편서풍대에 속하여 오히려 비가 잦은 편이다. 호텔에서 조식 후에 맨 먼저 찾은 곳은 콜로세움과 개선문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것을 달리 실제로 접하니 그 거대한 위용에 로마 황제들의 막강한 권력이 실체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피땀이 서린 곳인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가? 역사는 흘러가고 유적만이 남아 과거를 대변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찾은 팔라티노 언덕은 늑대 젖을 먹고 로마를 세웠다는 쌍둥이 로물루스 형제들의 신화를 낳은 곳으로 로마 건국 당시의 일곱 개 언덕 중 한 곳이라 한다. 영화 밴허의 실제 현장이었던 엄청난 크기의 푸른 잔디가 깔린 대전차 경기장 터가 언덕 앞의 낮은 지대에 넓게 그리고 길게 조망되는 이곳의 길 건너에는 카부르, 가리발디와 더불어 이탈리아 건국의 아버지라던 마치니 동상이 지켜보고 있었다. 로마의 도심부는 오랜 전통을 존중하는 곳으로 낡지만 튼튼한 건물들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보전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오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그레고리와 오드리의 데이트 현장인 진실의 입은 로마시대 하수구 뚜껑으로 사용되었다는데 거짓말을 한 사람이 손을 넣으면 잘린다는 유래를 가진 곳이다.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보나와 젬마와 나도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기념 촬영을 했다. 진실의 입을 보유한 1000년 역사를 지녔다는 코스메딘 산타마리아 성당 내부를 간단히 둘러본 후 수도의 어원이 된 곳으로 역시 일곱 언덕 중 한 곳인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향했다. 세 개의 궁전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현재 로마시청으로 이용되고 있다는데 광장 중앙에는 명상록으로 유명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 그 입구에는 늑대상과 로물루스 형제상이 버티고 있으면서 로마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수백 미터 좁은 골목길을 걸어 고대 로마의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지이던 포로로마노 전체를 조망하기 좋은 곳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에서 바라본 엄청난 규모의 이 유적지는 그 옛날 찬란했던 고대 로마 제국이 되살아나는 듯한 감흥과 환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러 개의 신전과 개선문, 공회장, 시장의 흔적이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복잡한 가로의 아이스크림 판매점에서 우리 모두투어 팀 모두 탐방의 열정을 식힌 후 인근의 트레비 분수를 찾았으나 수리 중 이었다. 그럼에도 그 명성만으로 찾아든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해 매우 혼잡했다. 줄을 지어 천천히 가설 다리를 지나가는 동안 소원을 비는 동전 투척하며 이 분수의 대략을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버스로 이동하여 영화 로마의 휴일의 촬영지였던 스페인 계단과 멋진 분수가 있는 스페인 광장에 잠시 머무르며 휴식을 취했다. 운치 있는 옛 역마차와 공중 부양의 장면을 살피고 로마의 명동이라는 건너편 번화가 콘도티 거리를 곁눈질하며 판테온 신전으로 향했다. 판테온 신전은 2000년 세월의 흐름에도 거의 원형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황제가 교황에게 이 신전을 헌정하여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마 어마한 규모의 중앙 돔 지붕은 하늘을 향해 구멍이 뚫려 있어 자연 채광으로 실내를 밝히며 바닥에는 흘러든 빗물이 스며드는 구조라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이곳에서 거룩하신 어머니 레지오 단원들에게 줄 선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얼굴이 새겨진 묵주를 구입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피자와 스파게티로 중식을 해결하고 천년 역사를 지녔다는 테베르강의 다리를 건너 교황이 통치하는 세계 최소의 독립국가 바티칸시국을 방문하였다. 입국 절차 없이 간단하게 티켓을 구입하고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라는 바티칸 박물관을 관광하게 되었다. 실내에서는 경건한 분위기 유지상 가이드의 해설이 금지된 관계로 밖에서 미캘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그림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듣고 내부 관람을 하게 되었다. 온갖 유명한 조각과 그림들은 그 부문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었으나 아무튼 정교함과 화려의 극치를 달림엔 틀림없었다. 미캘란젤로의 천지창조 천정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천정을 처다 보며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가톨릭의 총 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웅장 무비한 외관과 더불어 금빛 찬란한 실내 장식, 고급 대리석의 꾸며진 기기묘묘한 내부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는 듯 했다. 미캘란젤로가 유일하게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는 피에타상이 오래 오래 잔영으로 남는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종교적 신비로움을 함께 갖춘 불가사이한 건물이나 이 거대한 건축물의 축조 과정에 종교 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분리되게 되는 역사의 아픈 현실은 씁쓰레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이제는 지겨운 스파게티로 저녁을 먹은 후 호텔로 귀환하여 한국에서 가져간 팩소주 한 잔으로 여독을 풀며 잠을 청해 본다.
4일차 - 꽃의 도시 피렌체(프로렌스)의 영광과 그늘
어느 정도 숙면을 취한 탓인지 상쾌한 아침, 맑은 날씨였다. 호텔식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 후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꽃의 도시,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유명한 피렌체로 출발했다. 화장실 이용을 위해 중간에 휴게소 잠시 들렸는데 한번 들어가면 상품 매장을 한 바퀴 돌아서 나오는 것이 독특하다. 3시간 남짓의 주행으로 토스카나 주의 중심도시 피렌체에 도착했다. 문예 부흥을 가져오게 한 명문 메디치가의 본 고장이자 단테, 보카치오, 미캘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보티첼리, 마키아벨리, 갈릴레이가 등 역사적 인물들이 태어나고 활동했던 곳이다. 피렌체 시가지를 요리 조리 가로질러 점식식사를 위해 들린 집은 외면는 낡고 고풍스러웠으나 내부는 아기자기 하게 꾸며진 깨끗한 식당이었고 현지식이지만 메콤한 음식이 어느 정도 맘에 들었다. 중식 후 피렌체의 두오모(산타마리아)성당을 찾았는데 도시 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아름다운 종탑과 거대한 돔이 눈을 크게 뜨게 한다. 규모가 너무 커서 한 컷에 다 잡히지 않는다. 천국의 문이라는 황금문과 단테의 생가와 그가 다니던 조그만 성당을 관람 후 메디치가(현재 피렌체 시장의 관저)를 방문하였다. 이곳에는 건장한 모습의 코시모메디치의 기마상이 있었고 그 앞 넓은 공간에는 피렌체 정치의 중심지이던 시뇨리아 광장과 미술관, 시장의 관저로 이용되는 건물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메디치가는 원래 고리대금 중심의 금융과 양모 가죽을 이용한 제품, 알약의 약품 판매로 부를 축적한 가문인데 그 부를 연예, 오락 등 엔터테인먼트 부문에 투자하면서 문예 부흥의 시작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가문에서 여러 분의 교황이 배출되고, 또 그들이 면죄부 판매의 오류를 범한 것은 어쩌면 호사다마? 역사의 아이러니? 과연 그 무엇일까? 페루지 가죽시장에 들러 필갑과 가방 등 몇 개의 기념품을 구입하고 이어서 미캘란젤로 언덕에 올랐다. 피렌체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우리 가족은 시가지 가운데를 유유히 흐르는 강과 메디치가와 중앙 성당만이 우뚝 솟은 아늑하고, 그림 같은 중세틱한 경관에 반해 여러 장의 사진을 기념으로 남겼다. 이 언덕을 지키는 모조 다비드상을 뒤로하고 아페니노의 험한 산맥과 롬바르디아의 광대한 평원을 가로질러 수상도시 베니스에 도착한 것은 캄캄한 한 밤이었다. 호텔에서 여장을 푼 후 맛난 것 없는 호텔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은 후 역시 소주 한잔으로 베네치아의 밤을 뒤척였다.
5일차 - 물의 베니스(베네치아)와 경제 중심지 밀라노
아침 식사를 위해 엘리베이터 이용하면서 특이하게 이 고장 베네치아는 0층의 개념을 갖고 있음을 들었다. 호텔 로비가 바로 0층이었다. 물 위의 도시라 침수 시 활용 공간으로 0층을 두고 1층부터 실제 생활공간으로 활용하는 모양이다. 기마민족인 훈족의 침입을 대비하면서 수전에 약한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아드리아 바다의 섬과 갯벌 위에 건설한 도시가 베니스이다. 바다 위에 말뚝으로 건설한 이 도시의 건설 과정을 가이드로부터 들으면서 그들이 얼마나 강인하고 끈질긴 인간의 생존력을 보여준 것인지 가늠이 된다. 용맹한 사자를 상징 동물로 삼으며 주변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고 이 척박한 곳을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시킨 그들의 지나간 노고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해변을 거닐며 카사노바와 죄수들이 감옥으로 향하며 아름다운 베니스를 다시 못 볼 것을 탄식했다는 일명 탄식의 다리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곧장 나아가니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격찬한 산마르코 광장이 눈앞에 등장한다. 이 거대한 광장의 한 켠에 베니스의 상징인 산마르코 성당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수리중이라 가려져 있었다. 인근의 두칼레 궁전의 호화스런 외관으로 볼 때 과거 경제적인 부를 장악했던 베니스의 융성, 베니스 상인들의 활약상을 짐작하게 한다. 흔들리는 낭만의 곤돌라에 탑승하여 육지 도시의 골목길 같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좁은 운하망을 곤돌리에들의 묘기로 아슬 아슬 충돌을 피하며 지나 다녔다. 조용히 쉬는 곤돌라와 흔들리는 곤돌라는 한가한 사람과 바쁜 사람인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삶의 재충전을 위해 휴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세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으로 유명한 이곳은 발달한 운하망과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지리적 잇점을 이용하여 지중해 중심의 시대엔 유럽의 교역, 금융의 중심지로 발달했던 곳이며 베니스식 부기, 회계장부를 남긴 본 고장이다. 해변의 노점에서 유리 세공품(목걸이)과 베네치아 사자상을 기념으로 구입한후 날렵한 수상택시를 타고 중앙 대운하를 지나며 양안의 고풍스런, 웅장한 건축물을 보면서 육지 베니스로 다시 나와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늘날의 베니스는 우리나라의 울산처럼 석유화학과 조선공업이 발달한다고 울산 남목동 출신의 가이드가 설명을 덧붙인다.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롬바르디아 평원을 가로질러 이탈리아의 경제 중심이자 우리가 첫발을 디딘 밀라노를 향해 출발했다. 밀라노를 가는 중의 투명한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가로지르며 선명하게 남은 비행기의 하얀 이동로, 그리고 붉게 물드는 저녁놀은 아득하게 어린 시절 고향의 하늘같은 느낌이었다. 어둠이 깔릴 때 쯤 찾은 최대의 고딕 양식의 건물인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은 늦은 시각이라 야경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도 수없이 많은 첨탑이 하늘로 향해 쭉쭉 뻗어있는 모습이 기이한 경관을 나타내고 있었다. 유리 지붕의 우아하고 멋진 아치형 회랑인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 회랑은 수없이 많은 명품점과 카페, 그리고 엄청난 인파의 거리였다. 인근에 위치한 스칼라 극장 앞 광장의 중앙에는 동성애(?)로 인해 피렌체에서 밀려나 이곳 밀라노 공국으로 와서 활약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이 있었으나 수리 중이라 가림 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탈리아는 중세 이전 유럽 역사의 중심국이라 아시아의 중국과 같이 그들만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또 전통을 존중하여 한 집안의 가업이 대를 이어 수백년간 맥을 잇는다고 한다. 근대 이전에 여러 개 공국으로 나눠 경쟁했던 관계로 각 지방 마다 독특한 문화를 뽐내는 것 같기도 하다. 저녁 식사 후 호텔로 이동하여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6일차 - 스위스 융프라우요흐( 젊은 처녀 봉우리)
귀신도 잠자는 시각인 3시 반에 기상하여 간단하게 세면 후 컵라면과 빵 등으로 방에서 대충 조식을 해결하고 이른 새벽인 5시에 출발하여 스위스로 가게 되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을 거처 중간에 멋진 휴게소에서는 찬바람을 맞으며 멀리 보이는 설산을 배경으로 포즈을 취해 보았다. 알프스 산맥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스위스는 일찍부터 자연환경에 적응하여 생활을 유지한 관계로 목가적인 경관과 통나무집들이 골짜기 평지마다 그림같이 산재해 있었다. 목축과 용병 등으로 어렵게 생활하던 나라가 오늘날 관광과 시계산업과 비밀구좌의 금융업으로 세계적 부국으로 일어선 것은 대단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융프라우 등정의 거점도시인 인터라켄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현지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알프스의 영봉 융프라우(3454m)를 톱니바퀴(압트)식 산악열차(등반열차)를 타고 올라 가는데 중간에 2번 갈아타고 마지막 만년설 구간은 2번 쉬면서 올라갔다. 기압의 빠른 변화에 적응이 쉽지 않아 가슴이 요동치는 가운데에도 생후 가장 높은 고도에 다다른 감격으로 약간 흥분되는 것 같았다. 기이한 얼음궁전을 거쳐 스핑크스 테라스 밖의 만년설 현장에서 자유 시간이 주어 졌는데 눈부신 태양, 스위스 국기, 새하얀 설원, 유럽의 지붕을 이루는 뾰쪽한 흰 봉우리들을 보며 일행 모두가 그 아름다운 경관을 정신없이 폰에 담는다.우리 부부는 너무 추워 실내로 돌아왔는데 딸내미는 젊은 혈기라 밖에 오래 머무른다. 기념품점을 들리고 화장실을 찾던 중 남자 화장실이 수리중이라 지하에서 4층으로 뛰어 올라갔더니 금방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의 어려워진다. 이곳의 별미로 얼큰한 신 라면을 딸내미 젬마와 함께 맛 본 후 열차를 타고 그란데 발트로 하산하게 되었는데 올라갈 때 보다는 훨씬 쉽게 내려오는 느낌이다. 그란데 발트는 인터라켄 보다 고도가 높아 제법 추웠다. 걸어서 어느 호텔 식당에 도착하여 현지 음식 먹은 후 또 걸어서 또 다른 호텔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게 되었는데 스위스의 이 호텔은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출입문의 시건 장치가 열쇠식이었다. 우리나라의 일천 구백 팔십 년대가 생각이 난다. 한국에서 가져간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고 자작 소주 몇 잔으로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지만 오히려 정신은 맑아졌고 스위스 산속의 밤은 깊어만 간다.
7일차 - 파리 시내, 루브르박물관
아침 일찍 그란데발트를 출발한 버스가 오랜 시간을 달려 스위스와 프랑스 접경지역인 로잔 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탈리아 버스는 돌아갔고 우리는 이제 열차를 이용하여 파리로 가는 여정이다. 로잔 역은 주변이 매우 깨끗한 편이고 역도 아담하여 정감이 간다. 자연이 아름다운 스위스는 환경을 보전하는데 관심도가 높은 나라인 것 같다. 잠시 후 로잔 역을 출발한 떼제베 열차는 스위스 구간에서는 몇 차례 정차했으나 프랑스 남동부 지방의 드넓은 푸른 초원지대를 초고속으로 통과하여 파리의 리용 역까지 내달렸다. 프랑스는 알퐁스 도데의 별, 마지막 수업에서의 느낌이 오래 오래 각인되어 평소 신선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호감을 갖던 나라였다. 파리의 첫 인상은 도회지로서의 오랜 전통과 자유로움 속의 여유와 보이지 않는 질서가 느껴졌다. 쓰레기통 주변엔 쓰레기와 꽁초가 버려져 있었으나 길거리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현지의 특식으로 달팽이요리(항상 즐거운 표정으로 한국말 농담을 잘하는 프랑스인 요리사가 접대) 등으로 오랜만에 포식을 한 후 콩코드광장과 상 제리제 거리, 개선문을 거처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박물관 광장에서 몇 장의 사진을 촬영한 후 유리피라미드가 있는 중앙 입구에서 관람 시 유의사항을 듣고 입관하게 되었다. 모나리자, 나폴레옹 대관식, 가나의 혼인잔치 등 미술 교과서에 나옴직한 유명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문외한 이라 큰 감흥은 없었다. 다시 시내를 버스로 관광하면서 프랑스의 구국 영웅 잔다크 동상, 세계 최초라는 백화점의 외관, 콩코드광장과 상젤리제 인근의 불빛 축제를 차량으로 관람하였다. 밤의 에펠탑을 지나 우정이란 간판의 한식집에서 오랜만에 한국식 순두부로 저녁을 먹는데 함께 간 일행들 일부는 공기 밥을 더 청한다. 싸늘한 밤공기 속에 바토뮤슈 유람선을 타고 말로만 듣던 세느강 강변의 화려한 야경을 파리의 시발점이었다는 시태 섬을 돌면서 관람하는데 루브르궁, 노틀담 성당, 에펠탑 등 주요 건축물이 모두 세느강 유람선에서 한 눈에 들어온다. 파리의 중심부는 고도 제한을 하는지 높은 건물이 없다. 높은 건물은 오히려 시가지 외곽 일부 지역에 보이는 것 같다. 파리 외곽 어느 한 호텔에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내일을 위해 깊은 잠을 청해 본다.
8일차 - 에펠탑, 파리 시내, 베르사이유궁
아침 식사 후 9시에 구스타프 에펠이 설계한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으로 향했다. 빡빡한 일정의 우리 일행은 매우 일찍 도착했고 한참을 기다려 2층 전망대에 올랐다. 내부 기념품점을 둘러보고 외부 전망대에서 사방을 돌며 파리 시내의 아름다운 경관을 촬영하였다. 이동 중에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의 심신을 달랬다는 드넓은 푸른 잔디 광장과 노랗게 단풍든 숲의 아름다운 정경 앞에서 일행들이 소녀시절같이 들떠서 추억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시간 여유가 조금 있어 파리의 어떤 거리를 산책하면서 돌아가는 광고판 앞에서 보나가 포즈를 취한다. 그런데로 멋지다. 新香港酒褸(신향항주루)에서 중국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단결 화합을 뜻하는 콩코드 광장을 버스로 천천히 돌아 패션과 문화의 거리 상젤리제 거리를 지나 파리의 대표적 상징물인 개선문에서 하차했다. 개선문에서 머무는 시간이 짧았으나 우리 가족은 지하도를 건너가 개선문 바로 앞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개선문 정상으로 올라가 시내를 조망하는 것은 별도의 티켓을 구해야 할 수 있어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세느강변의 다이아나 황태자비의 죽음과 관련된 다리, 사랑의 자물쇠로 유명한 예술의 다리 등 유서 깊은 몇 개의 다리를 살펴본 후 베르사이유로 향했다. 베르사이유는 화려한 금과 대리석으로 장식한 궁궐로 건축학적, 기하학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듯 했다. 실내에는 수없이 많은 천정화와 벽화, 온갖 아름다운 조각 및 장식품, 왕의 침실, 집무실, 왕비의 침실과 거실, 거울궁전 등 모든 것이 ‘짐이 곧 국가다, 라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위세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궁궐 밖에는 거대한 평면의 옥외 정원과 잔잔한 호수, 비밀의 정원이 드넓게 펼쳐 있었다. 무한 권력을 갖고 세상을 호령하던 인물도 세월의 흐름엔 어쩔 수 없는가? 그들도 가고 언젠가는 우리도 간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다. 베르사이유 궁궐 밖 멀리에서 노동자들의 데모가 발생한 관계로 예정보다 미리 궁궐을 벗어나야 했다. 서둘러 집결지에 모이는데 키 큰 흑인 남자들이 에펠탑 모형 열쇠고리를 들고 벌떼처럼 모여든다. 나도 몇 개 샀지만 딸내미 젬마는 큰 모형과 작은 열쇠고리를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건장한 남자들이 조그만 열쇠고리 판매에 매달리는 비참한 그들의 현실에 애절한 감정이 일어남은 무엇 때문인가? 이 거대한 궁궐과 가난한 사람들의 거리는 얼만큼 먼 것일까? 괴리감이 든다. 현지시각 오후 3시 30분에 파리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 라는 책의 저자인 강문정이라는 파리 현지 가이드는 쉴 새 없이 베르사이유 궁궐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을 한다. 18시 전후 공항 도착하여 다급하게 출국 수속 후 여유를 갖고 면세점에서 와인과 사랑하는 손자 주원이의 인형을 구입했다. 대한 항공 소속의 우리 비행기는 현지시각 21시경에 이륙하였다.
9일차 - 그리운 대한민국으로!
귀국 길 역시 만만찮은 비행시간이었으나 우리나라! 그리운 대한민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맘 편히 창가에 기대 졸면서 생애 가장 짧은 1박을 보내고 11월 24일 15시 50분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입국 수속 후 짐을 찾고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18시 35분 공항을 출발하는 울산행 고속열차에 몸을 실으며 눈을 감아 본다. 이번 여행에 직접 부모를 데리고 다니며 경비를 지불한 딸 영주에게 고마움, 유로화 환전으로 여비를 보태준 아들, 며느리에게 미안함, 갓 태어나 걷지 못해 여행에 동참할 수 없었던 손자 주원에게 아쉬움, 그리고 친절하게 인도, 안내해준 가이드 분과 여행을 함께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후일 기억으로 새기고 싶어 작성한 이 여행기를 맺고자 한다.
2014년 12월 12일 淸谷
* 여행기와 관련된 사진 자료는 별도로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