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여섯 번째 편지 내용 요약 및 분석
1. 내용 요약
: 1842년 2월 28일 ~ 1843년 1월 15일까지에 발송된 편지들로 이 시기 김대건안드레아는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중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카오로 피신하였다. 마카오 대표부에서 이뤄지던 철학과 신학에 대한 공부는 사정상 또다시 중단되고 에리곤호 라는 프랑스 군함에 승선, 세실 선장의 통역 보조 역할을 맡으면서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대상지인 조선의 입국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이후 그가 주산군도와 상해, 남경을 거쳐 요동의 백가점에 이르는 노정에서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서신이 첫째에서 여섯 번째 편지이다.
첫 번째 편지는 1942년 2월 마닐라에서 마카오 대표부의 책임자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를 타고 조선을 향해 출발하게 됨과 자신과 최양업에 대한 안부를 전하며 스승 신부께 부자의 예로 글을 올리고 있다.
두 번째 편지는 주산군도에서 리브아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유실되고
세 번째 편지는 상해에서 마카오의 리브아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황세홍이란 외교인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 입국을 모색하고 당시 영국이 상해를 점령하면서 남경 조약을 맺을 때 에리곤 호 세실 선장의 통역 보조 역할로 조인식에 참석하고 격전지였던 진강부를 둘러 본 소감을 적고 있다.
네 번째 편지는 1942년 12월 요동의 백가점에서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올리는 서신으로 마닐라를 떠난 이후 대만, 주산군도, 양자강 하구에 이르던 여러 지역의 경관을 묘사하면서 영국 군대의 남경 점령과 진강부 파괴 현장을 답사한 소감을 적고 있다. 남경의 보인사 등을 관람하던 중에도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수시로 에리곤호로 선교지 조선으로 들어갈 방안을 찾으나 세실함장의 결단 보류로 걱정하던 중에 산동의 베지 주교의 배려로 어떤 신자의 배를 타고 15일 걸려서 일단 요동땅의 태장하에 입항하게 된다. 두요셉이란 교우촌 회장의 안내로 받으나 아편 전쟁 후 현지 중국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커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후 어떤 과부의 작은 집을 세 내어 머물며 조선으로 입국할 기회를 엿보며 조선의 국내 실정을 접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은혜로 어떤 위험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을 믿으며 스승 신부에게 정성을 다해 공경스런 편지를 올리고 있다.
다섯 번째 편지는 네 번째와 같은 1842년 12월에 요동의 백가점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수신자만 다를 뿐 네 번째 편지에 기록된 것이 중복되어 있으며 조선으로 갈 출발 날짜를 12월 22일로 정했으며 주교님의 염려로 메스트로 신부와 의 동행이 금지되었음을 적고 있다.
여섯 번째 편지는 요동 백가점에서 1843년 1월 15일 발송된 것으로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께 올리고 있다. 1842년 12월 23일 조선 국경 부근의 변문에 도착하여 하느님의 안배로 북경으로 들어가는 사신 일행 중에서 김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의 많은 신자 특히 자신과 최양업 토마스의 부모님의 순교와 고난,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님의 순교 소식을 접하면서 기해박해(1839년) 당시의 조선의 불행을 더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 국경의 통과가 지극히 어려움을 알고 중국옷에서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님께 의지하며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 성 밖 변두리에 머물며 정세를 엿보았으나 신변상 위험을 느끼고 결국 발길을 돌린다. 온갖 고초를 겪은 후 다시 압록강을 건너 1차 입국시도 닷새 만에 요동 백가점의 메스트로 신부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북경 간 김프란치스코가 돌아오길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음을 스승 신부에게 공경을 다해 서신을 올리는 것 까지가 여섯 번째 편지의 내용이다.
2. 내용 분석
(1) 선교사들과의 관계
한국교회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이던 모방신부에 의해 김대건 등 세 소년이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의 마카오 신학교로 파견되었었다. 마카오 대표부의 스승신부로는 르그레즈와 신부, 리브와 신부가 있었고 마카오 대표부에서 중국이나 조선으로 파견대기 중 신학생을 가르친 베르뇌신부, 메스트로 신부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마카오 민란으로 대피 중이던 마닐라에서는 데플레슈 신부의 지도로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김대건이 중국에서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때 영향을 끼친 분으로는 페레올 주교와 베지 주교 등이 있었다. 선교사들에 대해 그는 부모님 모시듯 깍듯한 예의와 지극한 공경으로 대한 것이 편지 내용 중에 잘 표현되어있다. 이는 그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믿음과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한 최고의 공경과 사랑이 영향을 끼쳐 그 가르침을 준 스승에 대해서도 공경과 순명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보인다.
(2) 편지에 드러난 신앙 및 선교 이해
하느님, 예수님, 마리아, 요셉, 성모님, 공경하올 신부님 등의 용어가 편짓글 중에 수시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 말씀에 대한 공경심이 대단하였고 주교님, 신부님에 대한 제자로서, 아들로서의 예의, 공경심, 순명정신이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1839년의 기해박해로 인한 국내 선교사와 부모님을 포함한 신자들의 참혹한 실상을 수시로 접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입국의 기회를 엿보며 폐쇄된 조국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은 순교를 각오한 선교 정신으로, 참 그리스도 정신으로 민족을 구하겠다는 애족심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3) 인간관, 국가관, 세계관
그는 짧은 신학교 수학기간 동안에 프랑스어, 중국어 등 여러 나라의 언어에 익숙한 것으로 보아 순수함과 총명함을 갖추었고, 체포 순간을 피해나가는 기지, 대담성, 결단력도 겸비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하느님, 예수님에 대한 신심과 스승신부님께 대한 공경 및 순명정신이 편지 곳곳에 드러나기도 한다. 편지 말미에 여러 차례 김해 김씨 라는 본관을 표기하고 수시로 부모님에 대한 소식을 탐문한 것으로 보아 효심이 매우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쇄국으로 일관한 조국 조선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은 곧바로 문호 개방 만이 근대화를 가져오고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로운 선교만이 조선이 나아갈 길 임을 절실함을 느낀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세 동점의 당시 세계사의 큰 흐름을 직시하고 또 영국 중국간의 아편전쟁과 남경조약으로 이어지는 현장에 직접 체험하면서, 또 프랑스 군함에 승선하여 자국의 이권을 확보하고자 노력하는 서양 나라들의 실체를 파악하면서 문호를 닫고 있는 조국 조선의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선교 정신을 더욱 강하게 다진 것 같다.
또 남경의 보인사 등 불교 신앙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신심을 더욱 높이게 된 것 같다. 그는 조국 조선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문호를 대외 만방에 개방하는 것만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그는 순교자로서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의 칭호를 받고 있지만 그 당시 암울했던 조국의 개화를 촉구한 측면으로는 겨레의 선각자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곱 번째~열 번째 편지 내용 요약 및 분석
1. 내용 요약
1843년 2월 16일~ 1845년 4월 6일 기간에 발송된 편지로 요동의 백가점, 몽고의 소팔가자, 서울이 발신처로 되어 있으며 주로 리브아 신부와 페레올 주교에게 서신을 올리고 있다. 백가점과 소팔가자에서 선교 대상지 조선으로의 입국 기회를 엿보던 김대건은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삭발례 후 부제품을 받게 된다. 이후 결국 1945년 1월에 조선으로의 입국에 성공하고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신자들의 도움으로 7일만에 한양에 도착하게 된다.
일곱 번째 편지는 요동 백가점에서 1843년 2월 리브아 신부께 올리는 편지로 변문에서 북경 사신단 일행 중에서 김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의 당시 실정을 파악한바 1839년의 기해박해로 자신과 최양업 토마스의 부모님과 200 여명 신자들의 순교와 수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접하면서 안타까움과 울분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그후 김대건은 선교대상지 조선의 입국 기회를 엿보다가 1차로 입국을 시도하여 의주 성밖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온갖 고초를 겪은 후 닷새 만에 백가점의 메스트로 신부에게로 되돌아 왔음을 공경하는 스승신부에게 알리고 있다.
여덟 번째 편지는 1844년 5월 페레올 주교가 체류하는 몽고의 소팔가자에서 리브아 신부에게 답신 겸 올리는 편지로 변문을 통해 접한 소식으로 조선내의 신자들이 목자없이 암흑을 헤매고 있다고 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계속 탐색, 2천리 떨어진 곳에서 조선과 중국의 교역이 열리는 훈춘과 함경도 경원까지 갔던 노정을 전하고 스승께 성경과 매일묵상책과 진품십자가 등 각종 성물을 보내주시길 간절히 청하고 있다
아홉 번째 편지는 김대건 부제가 부제품을 받은 날짜(1844년 12월 15일)가 이편지의 발송일과 같으면 페레올 주교에게 올린 것으로 원본은 유실되고 프랑스어 번역본만 보존되어 있다. 소팔가자를 떠나 썰매를 타고 장춘, 길림을 거쳐 장백산맥의 험한 장벽을 우회하여 영고탑을 찾아 헤매던 중에 중국인 교우의 도움을 받기도하고 맹수에게 생명을 잃은 포수의 장례 행렬과 중국 명절날의 미신 행위를 보면서 더욱 더 천주 신앙을 다지기도 한다. 진주문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영고탑 근처 초막에 머물기도 하면서 이곳 주민들의 여러 가지 이국적인 생활상을 체험하게 된다. 두만강 어귀 훈춘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교역이 이뤄지는 곳인데 일반 백성을 위한 교역은 조선의 국경도시 경원에서 2년에 한번 열릴 정도로 조선은 대외적으로 폐쇄되어 있고 외국인을 혐오하듯 함을 탄식하면서 온 인류의 아버지 천주 성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민족을 포용할 날이 언제 올까?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김대건 부제는 노정 중에도 수시로 주교님 뜻에 의해 주변 정황을 파악하기도 하면서 선교대상지의 특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청 왕조 발상지인 이곳은 그들이 정복하는 곳마다 옮겨 살게 됨으로서 이 곳 자체는 인적인 끊어진 적막한 고장이 되었고 덧붙여 만주족이 중국에 동화되어 감과 조선족, 우킨족, 유피타체 등 여러 종족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인근의 백두산은 청조의 시조 누루하치의 탄생지로 종교적 숭배 대상으로 순례자가 찾고 있음을 적고 그가 무능한 명의 만력제에 대항하여 청나라를 건설하게 된 과정을기록하였다. 함경도 경원에 교역 개시 통지를 받고 김대건은 서둘러 시장으로 나가 조선인 연락원이자 신자인 ‘한서방’을 만나 조선의 실상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선교사를 입국시키기엔 훈춘보다 변문이 유리하다는 판단을내린다. 쇄국 정책을 펼치던 조선이 개방한 경원 시장은 겨우 네, 다섯 시간만 개방되는 살벌하며 무질서한 국경의 시장이었으며 몇 몇의 조선 교우들에게는 제대로 작별도 못하고 훈춘으로 돌아왔음을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께 김해 김 조선인 부제가 절하며 올린다고 되어있다.
열 번째 편지에서는 1845년 3월 서울에서 스승 리브아 신부께 올리는 서신으로 변문에 온 조선인 신자와 김대건 부제가 묵주기도 바치면서 의주 인근을 우회하여 입국을 시도하던 중 조선인 연락원과 신자를 만나게 된 점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이후 타고난 기지와 대담성으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평양을 거쳐 서울에 도착, 신자들이 마련해준 집에 거처를 정했으나, 당시 살벌했던 나라의 형편상 귀국을 모친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방에서 병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당시 조선과 중국의 약조를 간파하고 새롭게 중국의 강남(상해)으로 배를 타고 가는 길을 개척코자 노력하고 있음을 알린다. 컴퍼스, 철필, 세계지도 등의 물품을 청하며 추신으로 당시 조선의 아기들에게 만연하던 천연두에 대한 처방을 스승께 청하고 있다.
2. 내용 분석
(1) 선교사들과의 관계
이 기간 동안에 김대건은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았으며 서신은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주로 올리고 있다. 간접적으로는 조선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두 분의 신부도 후일 김대건이 순교로서 선교하게 된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페레올 주교나 스승신부들에 대해 그는 자신의 부모님 같이 깍듯한 예의와 지극한 공경으로 대하며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과 순명의 도리를 다짐한 것 으로 보인다. 그는 선교사들을 그의 조국이자 선교대상지인 조선에 입국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활로를 뚫기 위해 결국 단독 입국을 단행하게 된다.
(2) 편지에 드러난 신앙 및 선교 이해
편짓글 곳곳에 여러 차례 하느님, 예수님, 마리아, 성모님, 요셉, 공경하올 신부님 등의 용어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 말씀에 대한 공경심이 생활화 되어 있었고 주교님, 신부님에 대한 제자로서, 아들로서의 예의, 공경심, 순명정신이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기해년(1839년)의 박해로 인한 국내 선교사와 부모님을 포함한 신자들의 순교와 수난을 접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입국의 기회를 엿보며 빗장을 걸어 잠근 조국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은 순교를 각오한 선교 정신, 참 그리스도 정신, 민족을 구하겠다는 애족심이 표출된 것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수시로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의탁한 것으로 보아 주님과 성모님에 대한 믿음이 각별하였음도 편지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3) 인간관, 국가관, 세계관
그는 깊은 신앙심과 총명함을 갖춘 분으로, 체포 위기을 피해나가는 기지, 대담성,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결단력과 더불어 신중함도 겸비했음을 편지 곳곳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느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스승 신부님께 대한 공경 및 순명정신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 편지 말미에는 여러 차례 김해 김씨의 본관을 표기하고 또 부모님에 대한 소식을 탐문한 것으로 보아 효심도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쇄국으로 일관한 조국 조선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은 오로지 문호 개방 만이 근대화를 가져오고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로운 선교만이 조선이 나아갈 길 임을 절실하게 느낀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아기들에게 유행하던 천연두 처방을 스승신부께 청하는 것으로 보아 민족애와 더불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도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주 횡단의 노정에서는 선교지 주변의 환경을 살피면서 미래의 동북아시아 정세를 예측하기도 하였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대외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만이 당시 암울했던 민족과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것이 후일 순교로서의 선교 정신을 빛낸데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앙생활의 자유는 김 신부님을 위시한 순교자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성취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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